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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직할 만한 책

달과 6펜스(서머싯 몸, 민음사)

by Minsung Kyung 2020. 10. 31.

자연 관찰 다큐멘터리에서 굶주린 늑대들을 본 적이 있다. 며칠간 먹지 못해 앙상한 몰골만 남았지만 이상하리만치 그들의 눈에는 광채가 서려 있었다. 뻣뻣한 털과 앙상한 몸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어떤 위엄이 느껴졌다. 심지어 그들은 아름다웠다. 반면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애완견들을 아름답다고 하지는 않는다. 애완견들에게는 귀엽다는 표현이 걸맞다. 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립의 유무다. 자신의 먹이를 스스로 찾는 존재에게 삶은 투쟁의 연속이다.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기민함을 유지해야 하니 그들의 정신은 날카롭고 눈은 빛날 수밖에 없다. 날것이 가지는 생생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자립한 존재에게 결정이란 자신의 몫이다. 그러나 애완견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항상 주인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타인에게 자신의 생사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인의 눈을 피하고 고개를 숙인다.

달과 6펜스를 읽다 보면 내가 글을 읽고 있는 것인지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때가 있다. 내가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는 작가의 생생한 묘사 때문이다. 글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내가 그 안에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화자의 눈을 통해 전해진 생생함이 나에게도 똑같이 떠올랐을 때의 흥분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그림이 글자로 전달될 수 있다니 놀라운 경험이다. 주인공이 오두막에 그린 그림이나 타히티섬의 항구를 묘사한 장면은 마치 내가 그 광경을 실제로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서머싯 몸은 색 조차 글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작가다.

 

하지만 이 책에서 글의 전달력 보다 집중해서 봐야 할 것은 예술을 추구하는 이의 삶이다. 책 속에서 예술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두 인물이 있다. 한명은 불멸의 작품을 남겼으나 빈곤한 삶과 고독 속에서 생을 마감했고 다른 이는 평범하게 삶을 영위해 나간다.

 

예술이란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이자 정의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은 다수가 가질 수 있지만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다. 그것은 원시로 돌아간 자, 야생성을 회복한 자, 다시 말해 한 개인으로 온전히 자립한 자만이 갖는 능력이다. 스트릭랜드가 창조적인 능력을 갖춘 이라면 스트로브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뿐 창조할 수 있는 영역까지 도달할 수 없는 자다. 둘의 비교를 통해 책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고 한 여자의 남편이다. 주식 중개인으로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남성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을 간직한 채 홀연히 사라진다. 이때부터 그는 예술, 즉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인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우선 그는 야생성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회사라는 굴레를 벗어나 자신이 직접 일을 찾기 시작했다. 동물들이 배고플 때만 사냥을 하듯이 그는 필요할 때에만 일을 했다. 보통의 사람들이 미래를 대비하는 것과 반대로 그는 현재의 삶에 충실한 야생의 모습을 되찾아 간 것이다. 야생의 늑대처럼 그의 몸 역시 굶주린 늑대의 그것을 닮아갔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해졌고 그의 눈은 빛났다. 현재에 충실한 삶으로 회귀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했다. 가족을 떠났으며 그가 염원하는 한 가지 목적 외에는 어떠한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연민이나 자신에 대한 연민조차 버렸다. 본질적인 목표에만 집중하는 효율적인 삶을 추구해 나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변화를 비난하기 보다 오히려 흠모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블란치 스트로브가 있는데 그녀는 스트릭랜드에게서 느껴지는 원시성, 야생성에 매력을 느끼고는 남편 대신 그를 선택했다. 

 

소설가 마루야마겐지는 그의 작품 ‘나는 길들지 않는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웅들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거짓 감동에 취해 울고 웃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런 짓은 아무리 해 봐야 당신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움은커녕 점점 더 시들어 가게 할 뿐이다.”(p.173) 스트로브가 바로 영웅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그런 인물이다. 그는 스트릭랜드처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그의 그림은 적당히 팔리고 그는 보통의 삶을 영위해 나간다. 흔히 볼 수 있는 좋은 이웃 같은 사람으로 타인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타인의 인정을 몹시도 갈구하는 사람이다. 그가 베푸는 선의의 이면에는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그림 역시 그를 닮았기에 적당히 팔리기는 하나 예술의 영역에 도달할만한 작품이 될 수는 없었다.

 

스트로브는 영웅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듯 스트릭랜드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그의 인정을 갈구하는 삶에서 끝까지 헤어 나오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마지막 까지도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는 것으로 일관하며 단 한 번도 자립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게 된다. 그는 끝까지 귀여운 모습, 뚱뚱한 몸을 벗어나지 못했다.

 

예전 독서토론 시간에 이런 질문을 받았었다. “당신은 동시대 베스트셀러와 후대에 남을 불멸의 명작 중 무슨 책을 쓰고 싶습니까?” 스트로브의 그림과 스트릭랜드의 그림 중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냐 는 질문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스트릭랜드의 삶을 떠올린다면 대답은 신중해질 수 밖에 없다.

 

한 철학자가 말했다. ‘선(Good) & 악(Evil)’ 이 아닌 ‘좋음(Good) & 싫음(Bad)’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스트릭랜드의 삶을 읽어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기준(Good & Bad)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주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고 예술가로 눈 감을 수 있었다. 

 

예술은 삶의 주인만이 남길 수 있는 아름다움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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