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영화관에서 진짜 치즈가 뿌려진 팝콘을 먹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진짜 치즈 대신 식용(edible) 치즈를 사용해서 예전의 그 맛을 느낄 수 없어 아쉬워요.’ 영어수업 중 강사가 했던 이 말 덕분에 나는 지금도 ‘edible’이란 영어 단어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예전처럼 마트에서 커피음료를 사지 않는다. 커피 향이 첨가된 커피 음료를 산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일 주스 역시 비슷한 이유로 구매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삶에 여유가 생기자 음식이나 식품의 성분이나 질에도 관심을 둘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한우 매대는 무심히 지나쳐 버리지만 아이스크림의 유지방 함유율이나 가공육의 원재료 비율을 한 번씩 살펴보곤 한다.
인기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는 말 그대로 삼시 세끼 차려 먹는 것이 전부다. 간단해 보이는 구성이지만 하루 세 번의 밥상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꽉 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현실의 삼시 세끼는 효율적인 분업화의 시대에 걸맞게 돈을 지불하고 얻어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직접 여행을 가는 대신 연예인이 떠난 여행을 지켜보고 책을 읽는 대신 유명 강사의 강연을 듣고 직접 맛보는 대신 남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방식으로 극한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물론 이 와중에도 비효율적인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은 더 큰 비용이 지불해야 함에도 직접 요리를 하고 제철 음식을 찾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궁금해진다. 쌀의 품종, 제철 식자재, 유기농 그리고 음식의 기원 등 음식과 관련된 세세한 것들이 궁금해진다. 때마침 음식칼럼니스트 황교익을 텔레비전에서 보게 되었다. 그는 우리의 음식이 정치와 경제 같은 외부상황에 밀접하게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즐기는 먹거리들이 맛 본래의 목적보다는 외부적 요인들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내가 먹는 음식이 맛이 아닌 어떤 의도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내가 그 의도에 길들었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주장이 좀 더 알고 싶어졌다. 우리가 즐기는 음식, 즉 한식에는 무슨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궁금한 나머지 다시 한번 그의 책‘한국음식문화 박물지’를 펼쳐보았다.
정치와 음식
저자에 따르면 향토음식이 굳어지게 된 시초는 독재시절 여론을 조작하려는 목적에서 진행된 행사였다. 독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돌리고자 기획된 ‘국풍’이라는 행사를 통해 알려진 각종 음식들이 지방의 이름과 함께 기억되면서 향토음식이 우리에게 굳어지게 된 것이다. 정치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까지도 우리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한편 삼계탕 역시 정치적 목적에 의해 기획된 음식이다. 대외적 이미지가 안 좋은 개고기를 대체하고자 찾은 보양식이 바로 삼계탕인 것이다. 양계산업의 번성으로 낮아진 닭 값도 한 몫 거들었다. 햄버거 역시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미지가 오르락내리락 한 대표적인 음식이다. 쌀이 모자란 시기에는 간편 건강식으로 쌀이 남아돌게 되면서부터는 외화유출의 오명을 뒤집어쓴 정크 푸드로 그 지위가 낮아지게 되었다.
정치는 우리의 입맛도 길들인다.
경제와 음식
산업화로 인해 음식은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다시 말해 싼값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번성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입맛 역시 그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미식이 소수에게만 허락된 유희라는 생각에 씁쓸해 진다. 아마도 다수는 효율적인 음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산업은 대중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에 맞는 음식, 즉 효율적인 음식을 제공하려 할 것이고 ‘edible’ 한 재료가 그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일본과 한식
우리나라를 이야기 하면서 일본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 전반에 걸쳐 일본의 영향은 그 뿌리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음식 또한 그렇다. 우리가 삼겹살을 즐기게 된 이유, 소고기 등급제, 감자와 고구마의 대중화, 된장 및 간장의 변화 등 셀 수 없는 음식과 식자재들이 일본의 영향아래 번성해 왔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은 돼지의 등심과 안심만을 본국으로 가져가고 우리에게 돼지부속물과 삼겹살 같은 자투리 부위만을 남겨주었다. 우리의 입맛은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이용해야 했기에 돼지부속물 그리고 삼겹살에 길들게 된 것이다. 소고기 마블링에 따른 등급제 역시 일본에서 배워온 제도다. 감자와 고구마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데 쌀을 수탈하고 나서 우리에게 남겨줄 것을 궁리하다 정한 것이 바로 감자와 고구마이다. 지금의 된장 간장은 일제치하에서 퍼진 것이 지금까지 내려왔다. 우리의 된장은 시골된장이란 이름으로 명맥조차 불분명하고 간장 역시 조선간장이란 이름으로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정도다. 디저트 열풍조차 일본의 그것을 고스란히 가져온 것이다. 문화에는 한류가 불지만 음식에는 일류가 분다.
한식의 세계화
김치는 무료다. 김치를 추가로 요청하는데 돈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김치는 어디에나 있다. 심지어 우리는 중국집에서도 김치를 요구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아 한다. 그만큼 김치는 한국의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식당에서 김치에 손을 대지 않는다. 대다수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저가 김치라는 점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내가 받은 김치가 누군가 남긴 것일 수 있다는 불신 때문이다. 김치는 우리의 소울 푸드 이지만 소울을 담은 김치는 고급식당에서나 볼 수 있다. 우리는 김치를 사랑하는 척 하면서 김치를 무시한다. 김치는 가난한 도시락의 반찬으로나 어울릴 법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김치를 외국인에게 먹이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군다. 김치뿐만 아니라 떡볶이 역시 외국인에게 반드시 먹여야 할 음식의 대명사로 꼽힌다. 저자는 여기에 우리의 열등감이 숨어있다고 꼬집는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특히 나보다 뛰어난 이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음식에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한식이 세계적이 되지 않음을 못 견디는 것일까? 생각해 볼만 한 지점을 저자는 건드려 주었다.
나아가 생각해 볼 것이 하나 더 있다. 과연 우리가 김치와 떡볶이를 즐기느냐에 대한 문제다. 김치는 구색 맞추는 용도로 전락한 지 오래고 떡볶이는 매운맛을 자랑하는 장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거기에는 미식이 자리 잡고 자랄 틈이 없다. 나도 즐기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즐기라고 권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가 아니다. 내가 즐기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부수적으로 관심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굳이 세계화를 노린다면 이편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한식의 정의
마지막으로 과연 한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남았다. 한식을 뭐라 해야 할지 쉽사리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식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탓이다. 이는 비단 한식만의 문제는 아니라 음식 자체의 국적은 대부분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떠한가. '우리는 한식을 즐기는가?' 앞서 말했지만 나도 즐기지 않는 것을 상대에게 권하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다. 이에 대한 답을 내려면 결국 질문은 다시 돌고 돌아 한식의 정의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식자재로 만든 음식이라는 답을 내어놓았다. 나 역시 그의 제안에 동의한다. 음식의 경계는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그러니 우리 땅에서 나는 식자재의 사용유무를 기준으로 한식을 정의해 보는 것은 나름 가치 있는 접근이 될 것이다.
한 작가가 통영 여행 중 식당을 방문하게 되었다. 추천메뉴를 문의하는 작가에게 식당의 쉐프는 통영에서 잡은 모시조개와 참소라를 이용한 파스타를 추천했다. 통영산 모시조개와 참소라를 이용한 파스타의 국적을 정의할 수 있을까? 아니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언젠가 이탈리아 사람들도 통영산 모시조개나 참소라를 활용한 파스타를 즐기게 될 날이 올 수도 있다. 나는 한식의 세계화가 이런 방향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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