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넘어 어른의 삶에 대하여, <순교자>를 읽고
살아간다는 것은 내일을 염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심리학자 김정운은 그의 저서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에서 중년의 삶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이유는 그들의 삶에 축제가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축제란 기념할만한 사건으로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나는 그가 언급한 ‘축제’라는 단어를 ‘희망’으로 바꾸어도 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희망이 없는 삶에서 내일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을 염원할 수 없는 삶은 죽음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집이 파괴되고 가족들이 죽어 가는 상황이라면 그 누구도 온전하게 버티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순교자」속 인물들은 절망을 딛고 일어서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너진 건물 잔해를 치우고 사체들을 옮기며 복구 작업을 해 나가는 그런 사람들이다.
복구 작업이 한창이던 와중에 평양시내에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남자들은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하고 여자들은 무릎을 꿇어 기도를 드린다. 작 중 화자인 이대위의 눈을 통해 우리는 종소리가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흔들린 종이 만들어낸 우연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은혜로운 종소리가 아닌 우연한 종소리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울려 퍼진 종소리에 맞춰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있을 것임을 약속했다. 따라서 기도는 사람들이 구원의 약속을 굳건히 믿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위다. 사람들이 버텨 낼 수 있는 이유는 그 약속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들의 기도 역시 무너진 세상 속에서도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위로 느껴졌다.
작품 전반에 걸쳐 고민의 토대가 되는 단어는 희망과 진실이었다. 희망이란 완벽한 긍정의 단어다. 그러나 희망을 ‘거짓’ 혹은 ‘날조’와 같은 단어들이 수식하게 된다면 어떨까? ‘거짓된 희망’, ‘날조된 희망’이란 여전히 긍정적인가? 이번엔 ‘진실’이라는 단어를 보자. 이 단어는 긍정할 수밖에 없는 단어이다. 그러나 진실로 인해 인간이 파괴될 수도 있다면, 그때도 우리는 진실을 긍정해야 할까?
신목사의 입을 빌어 정의된 것처럼 인간이란 희망과 약속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들이다. 나 역시 그가 내린 인간에 관한 정의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인간이 품고 있거나 품고자 하는 희망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그것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희망을 빼앗는 다는 것은 삶을 빼앗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 속에서 희망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묘사를 몇 가지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이 전쟁이라는 절망 속에서도 삶을 부지하고 있는 상황, 그들은 주저앉기보다는 도시 재건에 팔을 걷어 부친다. 한편 민 소령의 아내는 자신의 아이를 먼저 보내고도 종교를 버팀목 삼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이 아이들에게 실현되었음을 믿고 있음에 분명하다. 반면 희망을 잃어버린 자는 어떠한가? 한 목사는 살아갈 의지를 상실한 채 미쳐버렸고 종국에 그는 하나님을 부정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박 목사 역시 희망을 상실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인류가 맞닥뜨릴 종말과 그에 따른 구원의 답을 종교에서 찾아보려고 했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신실한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욥이 끝까지 그의 하나님을 믿었던 것과는 다르게 마지막 순간 하나님을 부정하며 생을 마감했다. 희망을 잃어버린 그가 종말을 맞이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거짓된 희망일지라도 그것을 품은 사람들이 생을 부여잡는 반면 희망을 품지 못한 사람들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누군가는 살아가고 누군가는 생을 놓아 버린다. 이 작품을 통해 그 차이가 희망의 유무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극중 인물들은 거짓된 희망과 진실이라는 자신들만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나는 거짓된 희망일지라도 인간을 절망치 않게 한다는 것에 공감하지만 극 중 화자인 이 대위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못하고 고뇌하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있었다. 날조된 희망이라도 주어야 한다는 신목사와 진실을 밝혀 현실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는 고 군목, 그들의 대립은 어떠한가? 나는 그 누구도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신 목사는 진실을 묵도한 사람이다. 미국과 국군은 공산주의자들의 포악함을 퍼뜨릴 요량으로 목사 12인의 순교가 사실이길 원했다.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입장에서 12사도의 순교를 연상시키는 목사 12인의 순교는 좋은 선전거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국군 역시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실상보다는 날조된 진실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군의 행동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뤄지는 것이다. 반면에 신 목사는 자신의 이익 보다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기반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일갈한 박 목사 그리고 마지막 순간 구원의 약속을 내팽개친 목사들을 순교자로 꾸미는데 동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절망에서 건져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반면 고 군목은 신목사와 달리 날조된 희망이 아닌 진실을 통해 사람들이 절망을 극복하기 바라는 인물이다. 신에게 매달린 채 소극적 자세만을 견지하는 행태보다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인물로 보인다.
언젠가 중년 가수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고백하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동연배에 대한 부채감을 토로한 것을 본적이 있다. 쟁취된 자유에 무임승차 했다고 자신을 자책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비단 민주화 운동만이 아니다. 아동 인권 운동, 흑인 인권 운동 그리고 여성 해방 운동 등 부조리함을 타파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의 공통점은 소극적 자세가 아닌 적극적 항거를 통해 쟁취되었다는 점이다. 신의 뜻만을 기다리며 순교를 받아들이는 자세는 일견 고귀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교회라는 신의 자비 아래 현실과 동떨어진 채 받아들이고 섬기는 삶에 익숙해 지다보면 행동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고 군목은 만들어진 순교에 매달린 채 순응하는 그들에게 진실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는 사람들이 진실을 통해 절망을 딛고 일어서 행동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진실을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 군목과 같은 마음을 실천으로 옮겼던 사례를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군사독재시절 기독교 회관이나 명동성당 등 종교 시설들이 민주화 운동의 피난처로 활용되었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또한 목사와 신부를 비롯한 많은 종교 지도자들의 지원 활동 역시 실재했다. 그들은 단순히 기도를 올리고 학생들을 축복해 주는 것을 넘어서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쫓기는 학생들을 보호하고 변호해 주었다. 고 군목이 안전한 남쪽 땅이 아닌 절망의 땅에 남기로 한 선택은 흡사 독재시절 학생들과 함께 밤을 지새 운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고 군목과 신 목사가 사태에 대응하는 방법은 차이를 보이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동일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다. 어떻게 인간을 사랑할 것인가? 방법이 다를 뿐 그들은 동일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 목사와 고 군목의 대립에서 어느 누구의 편에도 설 수 없었다. 그들 모두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절망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기댈 것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 두 사람의 고민이 만나는 지점 바로 그곳이다. 신 목사가 만들어진 희망을 건네며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즉 오늘과는 다른 내일이 있음을 믿게 만들고자 하는 반면 고 군목은 사람들이 거짓된 희망이 아니라 진실을 냉혹히 바라보고 현실에 대항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이 좌절하지 않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두 사람 뿐만 아니라 작품 속 인물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토대로 행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을 사랑할 것인가, 경멸한 것인가?’ 라는 질문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질문이다. 동화 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사람은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작품에서 눈여겨 볼만한 점이 바로 믿지 않는 이들이 보여준 사랑의 행동이다. 신의 가르침을 체득한 사람, 즉 믿는 자들만이 보여줄 법한 이 행동을 믿음 없는 자들 역시 동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장 대령은 부하들의 탈출을 위해 마지막 까지 남아 적을 저지하다 죽음을 맞이했고 민 소령은 철수할 수 있었음에도 중환자들 위해 곧 적의 수중에 떨어질 병원에 남았다.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가 약 2000년 동안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점은 사랑과 자비를 실천 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신 목사나 고 군목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장 대령이나 민 소령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옮겼다.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종교적 가르침의 유무를 통해서 가름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보편적으로 행해질 수 있고 행해져 왔다.
우리의 삶이 현실을 넘어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현상이 가속화 되고 있다. 산업의 발달뿐만 아니라 질병의 위협 역시 그 속도를 가속화 시키고 있다. 얼굴을 맞대기 보다는 모니터로 소통하는 것이 더 편한 시대가 도래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소통 방식의 단점은 감정이 배제된 채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감정이 사라진 곳에는 팩트(fact)만이 남는다. 팩트의 세계에서는 누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
고 군목이 결국 진실을 함구한 채 사람들에게 희망을 남겨두기로 선택한 것은 그가 궁극적으로 신 목사와 동일한 지점, 즉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선택이든 동일한 목표를 지향한다면 굳이 사람들이 품고 싶어 하는 희망을 빼앗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팩트의 문제에서 멀리 떨어져 문제의 본질을 바라보았고 논쟁이 아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팩트를 넘어섬으로써 그는 논쟁하는 사람이 아닌 행동하는 사람으로 변모했다.
우치다 타츠루의 작품 「어른 없는 사회」에서 작가는 어른의 자세란 명령하기보다 스스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는 「순교자」에서 수많은 어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혹자는 사람들을 대신해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의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명령하거나 불평하기보다 각자의 십자가를 묵묵히 짊어진 삶을 보여준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작품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마이클은 고민의 순간을 맞이한다. 진실을 밝혀 한나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진실을 묻어 둘 것인가? 아버지는 조언을 구하는 마이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어른들의 경우에는 내가 그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좋다고 여기는 것보다 더 우위에 두려고 하면 절대 안 된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책 읽어주는 남자」, 시공사(2013), p180
오늘날 얼마나 다양한 희망이 존재하는가? 미래를 본다는 무속인, 내세를 약속하는 구원자 등, 누구에게는 망상에 불과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희망과 약속일 것이다. 만약 인간이 희망이 있어야 내일을 염원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헛된 희망처럼 보이는 그것조차 긍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희망을 동력삼아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순교자」속 인물들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어른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자들을 버리지 않은 민 소령처럼 절망의 땅에서 사람들과 함께 버티기로 한 신 목사처럼 나 역시 내 위치에서 행동하는 삶을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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