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산과 빛
한 청년이 법륜 스님께 이삼십 대 남자들이 느끼는 역차별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그러자 스님께서 청년에게 되물었다. “아버지에게 유산이 있다면 받겠습니까?” “네. 받겠습니다.” 청년이 대답했다. 그럼 “아버지의 빚은 받겠습니까?” “아니오. 안 받겠습니다.” 청년이 대답했다. 스님은 이어 나갔다. “일본의 이십대들 역시 비슷한 말을 합니다. 자기들이 한 일도 아닌데 한국 사람들은 왜 자꾸 사과하라고 하느냐고.”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수천만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강제수용소를 통해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한 아버지세대 그들의 죄는 씻을 수 없는 것이다. 적극적인 가담자가 아닌 한발 떨어져 있던 방관자였더라도 그들은 모두 유죄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전범 아이히만을 관찰한 후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말했다. 그녀에 따르면 악인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생각하는 것을 멈추게 되면 누구라도 악을 행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고자 명령에 따랐던 한나 역시 유죄다. 나치즘을 이해하지 못한 채 히틀러를 위해 손을 들었던 독일 국민들 역시 유죄다.
미하엘 역시 그녀가 유죄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서 불안하고 병약한 소년에서 탈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하엘이 한나를 향유하며 성장한 것처럼 전후 세대는 전쟁세대를 향유하며 성장해왔다.
한나가 사라진 자리에 미하엘이 남았다. 마치 전쟁세대가 사라진 자리에 전 후 세대가 서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전 세대가 해결하지 못한 수치심이 남아있다.
결국 미하엘은 한나를 대신해 그녀가 일했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피해자를 찾아간다.
품위와 자유
이모에게서 받은 것이 많았다. 시골에선 보기 힘든 게임기며 장난감 덕분에 친구들은 우리 집에 자주 오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 역시 이모의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남달랐다. 대학교를 입학하고 나서 초등학생이었던 이모의 두 아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간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거금을 들여 자유이용권을 구입했다. 아이들에게 최대한 많은 놀이기구를 태워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이 기뻐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많은 놀이기구를 태워줄 욕심에 서둘렀다. 그러나 아이들은 출입구를 얼마 지나지 않아 위치한 뽑기 기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나는 놀이기구를 타러 가야 한다고 아이들을 재촉했으나 아이들은 그곳을 떠나길 원치 않았다. 나는 놀이기구를 타야 한다고 기어코 아이들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때를 반성한다. 지금에서 생각해 보면 나는 비싼 자유이용권을 최대한 많이 이용할 생각만이 가득했었다. 아이들이 많은 놀이기구를 타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좀 더 현명 했더라면 나는 자유이용권을 환불해서라도 아이들이 뽑기를 실컷 하게 했어야 했다. 그들은 놀이기구보다 뽑기를 더 좋아했다.
미하엘은 한나의 비밀을 밝혀 그녀가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녀의 품위와 자유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녀가 자신의 품위를 지키고자 결정했다면 그것은 행복의 여부를 떠나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미하엘은 그녀의 행복을 자신이 판단하기를 멈추었다. 그녀는 자신의 품위를 지키기로 했으며 미하엘은 그녀의 자유를 존중했다.
이 소설은 판사 출신의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에 의해 쓰였다. 그는 전쟁세대에 대한 전후 세대의 비판과 전쟁세대가 품고 있는 수치심을 한나와 미하엘이라는 인물 간 관계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강제수용소 경비원으로 일했던 한나는 나치의 적극적 가담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일반 독일국민들처럼 주어진 일을 수행했던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 그녀가 법정에 서게 되었다. 이 책의 첫 번째 질문이 여기서 등장한다. 범죄를 방관한 사람은 유죄인가? 무죄인가?
미하엘은 전후 세대를 상징하는 소년이다. 그녀는 한나와의 관계 속에서 그녀를 향유함으로써 성장했다. 종국에 그는 한나를 대신해 강제수용소의 생존자에게 사과하게 된다. 두 번째 질문은 이렇다. 전쟁세대가 범한 범죄에 대한 책임을 전후 세대가 함께 져야 하는가?
재판 중에 한나는 그녀의 비밀을 밝히지 않았고 그로인해 무거운 형량을 언도 받는다. 이에 미하엘은 그녀를 위해 그녀의 비밀을 대신 밝혀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미하엘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한다. 세 번째 질문은 이렇다. 어떤 이의 행복이 파괴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택은 존중 되어야 하는가?
좋은 작품에는 반드시 질문이 존재한다. 만약 거기에 잘 짜인 플롯까지 있다면 이는 명작이라 불릴 만하다. ‘책 읽어주는 남자’는 잘 짜여준 구성과 더불어 묵직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는 비단 독일사회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독일이 아닌 일본이라는 문제로 변형되어 읽힐 수도 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십대 남자의 역차별 문제로 읽힐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이는 행복에 관한 문제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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