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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직할 만한 책

모순 (양귀자, 살림)

by Minsung Kyung 2020. 9. 27.

이따금 우연한 선택이 소중한 인연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인연들은 빈약한 삶에 양감을 부여하곤 한다. 양귀자 작가의 ‘모순’ 역시 우리 삶에 무게감을 부여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고른 것은 제목의 강렬함 때문이었다. 책을 다 읽은 후 제목의 적확함에 다시금 감탄했다. 책의 제목은 정직하고도 정확했다. 모든 인물과 내용은 모순이라는 궤 안에 넘치지 않을 정도로 반듯하게 담겨 있었다. 덕분에 책의 어느 한 부분조차 막히지 않고 술술 읽힌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재미있다.

 

 

한국소설이 자폐적 경향을 띄는 것이 아쉽다는 일부 의견이 있다. 그래서 국내소설이 점점 독자를 잃어간다는 결론에까지 이른다. 내 안에서 돌고 도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마치 걷고 걷다 보면 생각이 생각을 불러 묻고 싶은 기억까지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유쾌한 것들을 통해 무의식을 깨우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쾌함은 단 한 발만 장전된 총알처럼 쏘고 나면 무용하다. 반면에 국내소설들은 자폐적일 수 있으나 삶의 이면을 작품 속에 보물 상자 마냥 숨겨놓았다. 그리고 그 상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내밀한 삶의 이면을 찾는 것에 흥미가 있다면 국내소설은 좋은 도구가 될 것이다. 참고로 이제 더 이상 국내소설이 자폐적인 경향을 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시대가 흘렀고 새로운 세대가 흘러가고 있다.

 

(1) 생의 외침

독백. 말은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더 이상 나를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 오게 될 때 우리는 나에게 말을 건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이다. ‘안진진’이라는 여성 역시 자신에게 경고를 보내며 소설은 시작한다. 그녀의 경고는 눈물을 동반할 정도로 단호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빈약한 삶이 이대로 흘러가게 두면 안 된다는 경고를 자신에게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탐구하며 살겠노라 결심했다. 그녀의 빈약한 삶이 부피감을 갖게 될 수 있을까?

 

(2) 거짓말들

농담. 삶은 만우절 농담 마냥 실없는 것일 수도 있다. 부모가 보여준 삶이 농담이라면 자식의 삶 역시 그 농담을 닮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녀는 농담 같은 부모의 삶을 설명한다. 그녀가 자신에게 보낸 경고가 당위성을 가지려면 부모의 삶이 농담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우절에 태어난 엄마와 이모의 삶은 단 몇 십 분을 차이로 극명한 대조를 보이게 된다. 이모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좋은 향기와 부드러운 선율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삶을 얻었으나 그녀의 엄마는 연기가 자욱한 동네 돼지갈비 가게에서 배를 채우는 것 외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삶에 머물게 됐다.

 

(3) 사람이 있는 풍경

가족. 그녀의 어머니는 시장 좌판에서 양말과 속옷 등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그녀의 동생은 파출소를 들락거리는 어설픈 건달이다. 그리고 그녀, 안진진은 빨리 어른이 되어 버린 사람이다. 20대라는 것 외에 내세울 것 없는 여성.

그녀는 한밤중 독백 이후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철저한 탐구를 통해 인생을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탐구의 주요 대상은 남자다. 왜냐하면 그녀가 자신의 삶을 전환하려고 하는 수단이 결혼이기 때문이다. 물론 삶을 전환하려는, 삶의 부피를 도톰하게 하는 수단은 다양할 것이다. 그녀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깊은 생각 끝에 그녀는 20대 여성이라는 강력한 매력을 적극 활용하기로 한다. 20대 여성이라는 것만으로도 인연은 우연치 않게 찾아오게 된다. 그녀 역시 현재 두 남성의 구애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4) 슬픈 일몰의 아버지

술꾼, 건달, 성격 파탄자. 그녀의 삶에 나침반을 제공한 결정적 공로자는 그녀의 아버지다. 이모부가 부유하고 평온한 삶을 이모에게 선사했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정반대의 삶을 어머니에게 안겨주었다. 자식들 역시 부모의 삶을 동일한 방식으로 떠안았다.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아버지는 엄마를 너무나 사랑했다. 다만 술에 취하게 되면 아버지는 엄마를 간수로, 그를 옥죄는 간수로 생각한 나머지 폭압적으로 저항하는 죄수가 된다.

 

(5) 희미한 사랑의 그림자

탐구된 사랑. 그녀에게 구애하는 두 남자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상반된 성향을 보인다. 김장우는 들꽃 사진작가다. 그는 진한 것보다는 희미한 것을, 강한 것보다는 연약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또 한 사람 나영규, 그는 유망한 기업의 직원이다. 그는 지연되지 않는 기차처럼 계획적인 사람이다.

그녀는 두 남자 모두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가 공표한 것처럼 한 발짝 물러나 두 남자를 관찰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진짜 사랑이 어느 남자를 향해 있는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또한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 순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6) 오래전 그 십 분의 의미

행복과 불행의 시작. 엄마와 이모는 단 몇 십분 차이로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다. 그 몇 십 차이로 인해 그들은 각기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몇 십으로 인해 그들의 삶은 극명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그 자식들마저.

 

(7) 불행의 과장법

불행의 역설. 그녀의 엄마는 불행으로 점철된 삶 속에서 단련된 사람이다. 그녀의 엄마는 소소한 불행조차 거대한 것인 양 과장한다. 그래야 저항 의지 역시 그에 걸맞게 증폭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불행은 삶의 의지를 북돋아 준다.

 

(8) 착한 주리

순리대로 사는 사람. 이모의 딸 주리와 그녀는 동갑이다. 그러나 이모와 엄마가 보이는 삶의 격차만큼이나 주리와 그녀의 삶 역시 큰 격차를 보인다. 주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순리대로 걸어가는 사람이다. 결국 주리는 삶의 이면을 절대 보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녀의 삶 어느 부분도 모순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9)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

간수. 술에 취한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를 간수라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옥죄는 간수에게 저항했다. 아버지처럼.

 

(10) 사랑에 관한 세 가지 메모

전화와 유행가 그리고 거울. 그에게 걸려온 전화와 그렇지 않은 전화 외에 다른 전화는 없다. 유행가 가사는 진실하다. 그리고 사랑은 번번이 나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11) 사랑에 관한 네 번째 메모

사랑하면, 나의 누추함을 감추고 싶게 된다.

 

(12) 참을 수 없는 너무나 참을 수 없는

고요한 무덤. 이모는 순리대로 사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반면 엄마의 삶은 불행으로 점철되었기에 불행을 과장해서라도 의지를 불태워야만 했다. 길은 번번이 막다른 곳으로 향했기에 엄마는 스스로 길을 내어야 했다. 덕분에 엄마가 가진 삶의 부피는 한없이 넓을 것이다.

 

(13) 헤어진 다음날

허방을 딛는 느낌.

 

(14) 크리스마스 선물

아버지.

 

(15) 씁쓸하고도 달콤한

넘치는 사랑. 넘치는 사랑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은 자칫 사람을 다른 길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 역시 넘쳤다. 그에게서도 넘치는 사랑이 느껴진다.

 

(16) 편지

생의 전언. 행복은 권태로움을 수반하고 불행은 의지와 함께한다. 둘 다 가질 순 없다.

 

(17) 모순

삶은 탐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가며 탐구하는 것. 그녀는 그녀가 갖지 못한 그리고 순리대로 살게 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물론 그녀 역시 자매의 실수를 똑같이 되풀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의 어떠한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우이독경'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삶은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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