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days)

시작한다면 완성된다. (마라톤 풀코스 완주)

Minsung Kyung 2020. 9. 27. 08:51

너무 성급했다. 내가 결승선을 통과하는 영상을 나중에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제서야 후회가 밀려왔다. 당시 나는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이 고통을 끝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는지 당시에는 몰랐다.

 

당시 느꼈던 몇가지 생각을 이곳에 정리한다.

 

첫째, 파워젤

걷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는 의지력. 그것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작용에 의해 솟구치거나 사그라진다. 반면 체력은 외부로부터 공급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면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장시간 달리게 되면 근육 안의 에너지가 모두 고갈되는 순간이 온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일정 구간마다 바나나, 초코과자, 파워젤 등이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바나나, 초코과자 같은 식품들은 소화된 후 근육 속 에너지원으로 저장되는데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파워젤은 짧은 시간에 에너지원으로 저장, 활용된다. 문제는 선두그룹이 파워젤을 다 소모해 버린다는 것이다. 선두그룹에 속할 수 없다면 개인적으로 파워젤을 구비해서 에너지 고갈로 더 이상 달리기 힘든 순간이 오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시선

프로 선수들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훈련된 사람들이며 경험 또한 풍부하다. 그들은 달리기에 최적화된 자세를 끝까지 유지한다. 그들의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 흔들리지 않는다.

마라톤 코스에는 일정 구간마다 km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그 표지판은 간혹 이렇게 속삭이곤 한다. ‘당신은 아직 이만큼 밖에 오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만 걷는 게 어떻습니까?’ 이 속삭임을 듣게 되는 순간이 바로 위기다. 위기의 순간을 맞닥뜨리면, 발끝에 시선을 고정하며 달려보자. 한걸음 한 걸음이 모여 결승선을 끌어당길 것이다.

 

셋째, 긴장과 소변

프로가 아니라면 풀코스는 100m 달리기 경기 마냥 치열한 기록경기가 아니다. 끝까지 평상심을 흐트러뜨리지 않는지가 중요한 스포츠다. 그렇다고 해서 긴장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출발선에 서게 되면 ‘완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며 긴장도가 대폭 상승한다. 이윽고 출발 신호가 떨어지면 일부 무리들이 대형을 이탈해 길가에서 소변을 보기 시작한다. 출발하고 얼마 동안은 좌우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이 좋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한적한 교외에서 치러진 대회이기에 일어난 일이 아닐까 한다. 그랬으면 좋겠다.

 

넷째, 취향의 다양성

사람마다 다르지만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 들리는 빠른 박자의 음악은 바닥난 의욕을 채워주곤 한다. 반면 누군가에게는 발라드, 성경, 불경 등이 의욕을 북돋아 주는 역할을 한다. 잔잔하고 거룩한 혹은 성스러운 그것들은 흡사 헬스장에 울려 퍼지는 ‘Eye of the tiger’(영화 ‘록키’의 삽입곡)처럼 그들의 의욕을 증진시킨다. 그리고 그 효과는 스피커를 통해 강제로 함께 달리는 이들에게 공유된다.

그제야 독서실용 귀마개를 낀 채 달리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됐다.

 

다섯 째,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달리는 와중에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지만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순간이 왕왕 찾아온다.

 

여섯 째, 승리자의 포즈

결승선이 저 멀리 보이게 되면 순간적으로 이 고통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그래서 재빨리 결승선을 통과한 후 달리기를 멈춘다. 그래서는 안 된다. 결승선이 보이면 침착해야 한다. 도로 중앙에 몸을 위치시킨 후 발끝에 두었던 시선을 정면에서 약간 위로 쳐들고는 양손을 번쩍 위로 치켜 올려야 한다. 그렇게 당당한 자세를 유지한 채 결승선을 통과해야 한다. 당신은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사진

결승선을 통과하고 난 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기록 전광판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다. 기록 전광판 앞에서 대기하는 것은 감수할 만큼 가치가 있다. 자신의 사진을 찍어 줄 일행이 마땅치 않을 때 진행요원이 사진을 찍어주게 되는데, 가급적 여성 진행 요원에게 부탁하는 것이 낫다. 물론 이건 순전히 편견이다. 그 편견으로 인해 누군가는 이런 메일을 쓰는 실수를 범했다.

“중략……. 다만 오점 하나는, 혼자 온 사람들은 기록판넬 앞에서 사진을 찍을 때 진행요원들에게 부탁하게 됩니다. 그런데 남자 진행요원들 사진 너무 못 찍습니다. 사진 도우미는 여자 진행요원으로 부탁드립니다. 남자 진행요원들 사진 스킬, 영혼 둘 다 없습니다. 남자 진행요원이 찍어 준 사진 보고 참을 수 없어 메일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대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덟 번째, 빵

결승선을 통과하게 되면 완주메달과 각종 간식을 받는다. 간식 중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빵이다. 완주 후 대부분은 허기진 상태이기 때문에 무슨 빵이든 맛있다. 간혹 고급(비싼) 빵을 주는 마라톤 대회가 있으면, 주최 측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어 이런 메일을 쓰는 사람이 생긴다.

"OO 연도에 참석했었다가 여타 대회에 비해 진행이 훌륭해서 00년 또 참석했습니다.

코스 선정(도시, 공원, up hill), 진행의 매끄러움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빠른 진행 모든 게 좋았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 여타 대회는 완주 후 OO 딸기잼 빵 주는데 OOOO 초코 빵 이라니, 굿 굿!!

작년 OO 빵도 넘 맛났습니다. “

 

마지막, 확률

그나마 최근 치러진 2019 춘천 마라톤 풀코스 완주 비율은 참가자 대비 89%이었다.

참가자 대부분이 높은 확률로 승리하는 게임이니 걱정하지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