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라임 오렌지나무(J.M.바스콘셀로스, 동녘)
한창 책에 관심 많던 시기 독서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참여자들은 각자의 소개와 더불어 몇 가지 질문을 함께 받았다. 그 질문 중 하나가 바로 기억에 남는 책 세 권을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첫 번째로 언급한 책이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였다.
중학생 시절 어느 날 오후였다. 낮 시간 집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주말이었을 것이다. 따사로운 햇볕이 창문 너머로 들어왔고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이 책을 읽었다. 주말 오후 낮 시간 무료함을 채울 요량에 집어 든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책을 읽는 재미가 언제 시작되었냐고 묻는다면 그 따뜻한 오후 이 책을 통해서라고 말하겠다.
그날 오후 나는 한참을 울었다. 제제가 무척 아팠고 어떤 아저씨가 문병을 와서 제제를 위로하는 장면에서 나는 그만 펑펑 울고 말았다. 그 장면에서 내게 차올랐을 그 슬픈 감정은 지금도 아련하다. 왜 그랬는지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 기분만이 먹먹하게 남았다.
내가 느꼈던 감정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어져 책을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책을 다시 구매했다. 내 기억에 강렬히 남아있던 장면은 정확히 이랬다. 제제는 뽀르뚜까 아저씨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팠던 것이었다. 그리고 문병을 왔던 사람은 아리오발두 아저씨로 제제와 같이 악보를 팔던 사람이었다. 물론 아리오발두 아저씨 말고 제제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왔다. 모두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생각됐던 제제가 실은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슬픔을 느꼈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제제의 슬픔에 공감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내 감수성이 청소년 시절의 그것보다 상당히 무뎌져 버렸다. 또 하나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다. 아이가 받는 존재라면 어른이란 주는 존재일 것이다. 이제 나는 위로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위로해 주어야 하는 위치에 다다른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제제가 아니라 아리오발두 아저씨여야 한다. 그리고 나는 뽀르뚜까 아저씨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내가 발견한 몇 개의 키워드를 살펴보고자 한다.
연민, 제제는 연약한 것 작은 것에 대해 연민을 가진 아이다. 동생 루이스와 라임 오렌지나무를 대하는 그의 태도 그리고 쎄실리아 빠임 선생님에게 꽃을 선물하는 제제의 모습에서 나는 제제가 가진 측은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의미, 제제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그 대상이 불리는 이름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 그럼으로써 둘은 그 누구보다 더 특별하고 가까운 사이가 되어간다. 연인 사이 서로의 애칭을 통해 그 관계가 돈독해지는 것처럼 라임오렌지 나무는 밍기뉴 혹은 슈르르까로 불림으로써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제제의 특별한 친구가 되었다.
긍정,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심리적 문제를 가진 사람에게는 무조건적인 긍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제제는 매질보다 관심이 필요한 아이인데 그 누구도 제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 뽀르뚜까 아저씨는 제제에게 무조건적인 긍정을 보여주었다. 뽀르뚜까 아저씨로 인해 제제는 치유될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성숙, 어느 순간 제제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 반면 그의 동생 루이스는 여전히 상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제제는 루이스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 것을 알았음에도 루이스의 상상을 긍정해 주었다. 이는 제제가 아이에서 소년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와 어른, 청소년 시절 위로받는 제제를 나와 동일 시 했다면 이제 나는 어른으로서 제제를 위로해 주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